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철종의 가계도 조선 25대 왕 철종 가계도와 강화도령 철종의 운명

스마트블로그 2025. 3. 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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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역사에서 가장 기구한 운명을 타고난 왕이 있다면 단연 철종(哲宗, 1831~1864)을 꼽을 수 있습니다.

왕이 되기 전까지 누구도 주목하지 않았던 사람이었고 강화도에서 나무를 하고 농사를 지으며 살아가던 청년. 철종이 하루아침에 조선의 왕이 될 것이라 예상한 사람은 아무도 없었습니다.

그러나 1849년 19세의 철종은 갑자기 왕위에 올랐고, 나라의 운명을 짊어지는 존재가 되었습니다.

철종은 왕이 된 나무꾼이라는 별명으로도 불렸지만 그 별명 속에는 한 나라의 임금으로서 감당해야 했던 무거운 현실이 담겨 있었습니다.

과연 철종은 왕이 된 후 무엇을 꿈꿨고, 어떤 삶을 살았을까요?

철종 어진

나무꾼 왕의 탄생 - 강화도령

철종은 1831년 한성부 경방행(현 서울 종로구)에서 태어났습니다.

본래 이름은 이원범. 조선 왕실의 혈통을 타고났으나 직계 왕위 계승자들과는 거리가 먼 인물이었습니다.

철종의 할아버지는 정조의 이복동생 '은언군'으로 사도세자의 서자로 태어나 왕실에서 떠나야 했던 인물이었습니다.

은언군은 정치적 음모에 휘말려 유배되었고 그의 아들인 전계대원군(全溪大院君, 철종의 아버지) 또한 역모 사건에 연루되어 강화도로 유배되었습니다.

철종은 그렇게 몰락한 왕족의 후손으로 강화도에서 자랐습니다.

어린 시절 그는 왕족이라는 신분을 잊고 일반 백성처럼 농사를 짓고, 나무를 하며 생활했습니다.

강화도 주민들은 그를 단순한 지방 양반의 아들로 알았으며 철종도 스스로 왕실과는 상관없는 인생을 살 것이라 믿었습니다.

그러나 운명은 그를 그냥 내버려 두지 않았습니다.

철종 즉위의 비밀

1849년 조선은 혼란에 빠졌습니다.

당시 왕이었던 헌종이 후사 없이 21세의 젊은 나이로 갑자기 세상을 떠났기 때문입니다.

문제는 왕위를 이을 적절한 왕족이 없었다는 점인데, 조선의 왕위 계승은 보통 적장자로 이어지지만 정조의 직계 왕통은 헌종을 마지막으로 단절된 상태였습니다.

결국 조정은 다시 사도세자의 후손으로 눈을 돌릴 수밖에 없었습니다.

이때 왕실의 최고 어른이었던 대왕대비 순원왕후와 세도를 쥐고 있던 안동 김 씨 가문은 새로운 왕을 찾아야 했죠.

마침 그들의 눈에 띈 인물이 강화도에서 조용히 살고 있던 이원범(철종)이었습니다. 

이원범은 사도세자의 후손이었고 조선 왕실과의 혈통을 유지할 수 있는 거의 유일한 인물이었기 때문에 그를 왕으로 세우기로 결정한 것입니다.

이 소식을 들었을 때 철종은 믿을 수 없었습니다. 그는 처음에는 도망치기도 했고, 자신을 잡아 죽이려는 줄 알고 두려움에 떨었습니다.

그러나 조정의 사신들이 그의 신분을 공식적으로 확인하고 왕위 계승자로서 모셔가겠다는 뜻을 밝히자 그는 가마에 올라 한성으로 향했습니다.

그리고 1849년 7월 28일, 철종은 창덕궁 인정문에서 조선의 제25대 왕으로 즉위했습니다.

왕이 된 후에도 나무를 하던 철종

왕이 된 후에도 철종은 여전히 서민적인 성향을 버리지 못했습니다. 화려한 궁중 생활보다 자연 속에서의 소박한 삶을 그리워했죠.

즉위 초기에는 아침마다 새벽에 일어나 궁궐 뜰을 거닐며 나무를 하거나 직접 벼를 찧고 곡식을 거두는 모습을 보였다고 합니다.

신하들은 이런 철종의 행동을 보고 어리둥절해했지만 "왕이 된다고 해서 백성이 어떻게 사는지 잊어버려선 안 된다."라고 말하며 자신만의 방식으로 통치하고자 했습니다.

그러나 철종의 소박함이 곧 왕으로서의 한계로 작용했습니다.

철종은 즉위 전까지 제대로 제왕 교육을 받은 적이 없었습니다. 

세자가 되거나 세손으로서 정치 수업을 받은 것이 아니라, 농사일과 생계유지가 그의 일상이었기 때문입니다.

정치 경험이 부족했던 철종은 조정을 완전히 장악한 안동 김 씨 세력에 의해 꼭두각시처럼 움직이게 되었습니다.

철종의 정치적 시도

철종은 즉위 후 처음에는 백성을 위한 정치를 꿈꿨습니다. 

삼정(三政, 전정·군정·환곡)의 문란을 해결하기 위해 삼정이정청(三政釐整廳)을 설치했고 관리들의 부정부패를 근절하려 했습니다.

그러나 조정을 장악하고 있던 안동 김 씨 세력은 이를 방해했고, 개혁은 제대로 이루어지지 못한 채 흐지부지되었습니다.

철종의 재위 기간 동안 가장 큰 사건은 1862년 임술민란(壬戌民亂)이었습니다.

경상도 진주를 시작해 전국에서 농민들이 폭동을 일으켰으며 이는 조선 후기 최대 규모의 농민 항쟁이었습니다.

철종은 민란을 수습하기 위해 노력했지만 실질적인 권한이 없는 왕은 아무것도 할 수 없었습니다.

결국 봉기는 잔혹하게 진압되었고 민심은 더욱 악화되었습니다.

철인왕후와의 관계

철종의 왕비는 철인왕후 김 씨(哲仁王后 金氏)였습니다.

철인왕후는 안동 김 씨 가문 출신으로 철종이 즉위하자마자 강제로 정략결혼을 하게 되었습니다.

철종과 철인왕후의 사이는 원만하지 않았습니다.

철종은 안동 김 씨 세력에 반감을 가지고 있었고, 철인왕후 역시 정치적 목적을 위해 왕비가 되었기에 남편과의 감정적인 유대가 깊지 않았습니다.

그럼에도 철인왕후는 강한 성격을 가진 여인이었고 조선의 국모로서 역할을 다하려 했습니다.

철종이 정치적으로 무능했던 것과 달리 철인왕후는 조정의 권력 다툼에서 중심을 잡으려 했습니다.

철인왕후는 철종이 사망한 후에도 대왕대비가 되어 후임 국왕인 고종을 보필하며 영향력을 유지했습니다.

철종의 마지막

철종은 재위 내내 정치적 무력감 속에서 살아갔습니다.

그가 꿈꿨던 개혁은 모두 실패했고 결국 술과 여색에 빠지며 현실을 잊으려 했습니다.

그러던 중 1863년 12월 갑작스러운 병을 얻어 이듬해 1월 16일 32세의 젊은 나이에 창덕궁 대조전에서 생을 마감했습니다.

철종은 후사를 남기지 못한 채 요절했습니다.

조선 왕실의 직계 혈통은 완전히 끊어졌고 결국 왕위는 사도세자의 또 다른 후손인 흥선대원군의 아들(고종)에게 넘어가게 되었습니다.

철종의 죽음은 조선 후기 세도정치의 마지막을 알리는 신호탄이었고 이후 조선은 격변의 시대를 맞이하게 되었습니다.

철종은 왕이었지만 그 누구보다 왕이 아니었던 삶을 살았습니다.

강화도령에서 하루아침에 왕이 되었지만 조선을 움직일 힘을 가지지 못한 군주였습니다.

철종의 짧은 생애는 조선 후기의 쇠퇴를 상징하는 또 하나의 비극으로 남게 되었습니다.

철종의 가계도

철종의 가계도는 조선 후기 세도정치의 중심에 있던 안동 김 씨 가문과 깊이 얽혀있습니다.

후사를 많이 두었으나 대부분 어린 나이에 요절했습니다. 철종의 유일한 생존 딸인 영혜옹주는 개화파 정치가 박영효와 결혼했지만 14세에 요절하여 철종의 직계는 완전히 단절되었습니다.

구분 이름 비고
고조부 영조 이금 조선 21대 왕
증조부 장조 의황제 이선 철종의 친증조부, 사도세자
조부 은언군 이인 철종의 친조부
부모 전계대원군 이광 철종의 아버지
  용성부대부인 염씨 철종의 어머니
본인 철종 이변(李昪) 조선 제 25대 왕
왕비 철인장황후 김씨 안동 김씨 가문 출신
후궁 귀인 박씨  
  귀인 조씨  
  숙의 방씨  
  숙의 김씨  
  숙의 범씨 영혜옹주의 생모
  궁인 이씨  
  궁인 박씨  
자녀 원자 이융준(李隆俊) 적장남, 요절
  왕자(이름 미상) 서1남, 1854년생
  왕자(이름 미상) 서2남, 1859년생
  왕자(이름 미상) 서3남, 1861년생
  왕자(이름 미상) 서4남, 1862년생
  왕녀(이름 미상) 서1녀, 1851년생
  왕녀(이름 미상) 서2녀, 1853년생
  왕녀(이름 미상) 서3녀, 1856년생
  영혜옹주(永惠翁主) 서4녀, 1858~1872, 박영효에게 하가
  왕녀(이름 미상) 서5녀
  왕녀(이름 미상) 서6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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