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순조 가계도 조선 23대 왕 순조 임금 세도정치의 시작

스마트블로그 2025. 3. 16.
반응형

1800년 조선의 개혁 군주 정조가 갑작스럽게 세상을 떠났습니다. 왕세자였던 순조(純祖, 1790~1834)는 불과 10세의 어린 나이에 왕위에 올랐습니다.

아직 정치 경험이 부족했던 순조는 즉위와 동시에 정순왕후 김 씨(영조의 계비)의 수렴청정 아래 놓였습니다.

정순왕후는 섭정을 하면서 노론 벽파를 중심으로 권력을 행사했고 1801년에는 신유박해를 일으켜 천주교 신자들을 대대적으로 탄압했습니다.

이때 정조 시절 등용되었던 남인과 시파(時派) 세력은 크게 위축됐고 조선의 정치 균형이 급격히 무너졌습니다.

정순왕후가 1805년 사망한 후 순조는 16세의 나이로 친정을 시작했습니다.

하지만 어린 시절부터 조정의 주도권을 잡지 못했던 순조는 외척 세력인 안동 김 씨에게 정권을 넘겨주다시피 했고 조선은 세도정치(勢道政治)라는 새로운 국면을 맞이하게 됩니다.

순조 불에 탄 어진

세도정치의 시작 - 안동 김 씨

순조가 친정을 시작했을 때, 이미 조정의 실권은 장인인 김조순을 중심으로 한 안동 김 씨 가문으로 넘어간 상태였습니다.

김조순과 그의 후손들은 순조 재위 기간 내내 국정을 장악하며 이후 헌종과 철종 때까지 약 60년간 세도정치를 이어갔습니다.

세도정치는 특정 가문이 왕을 대신해 조정을 지배하는 정치형태를 말하는데요. 이는 왕권을 크게 약화시켰고, 지방 행정은 부패로 얼룩졌으며 삼정(전정, 군정, 환곡)의 문란이 심각해졌습니다.

특히 안동 김 씨는 권력을 유지하기 위해 국정을 독점하고 인사권을 장악하며 반대 세력을 숙청했습니다.

이로 인해 조선은 더욱 경직된 사회로 변모했꼬 국가의 경제 기반도 급격히 약화되었습니다.

대규모 반란 - 홍경래의 난

순조 시대의 가장 큰 사건 중 하나는 1811년 홍경래의 난이었습니다.

홍경래는 서북 지방(평안도)의 몰락한 양반 출신으로 지방관들의 부정부패와 차별에 불만을 품은 민중과 함께 반란을 일으켰습니다.

그는 "평안도에도 왕이 있어야 한다"는 구호를 내 걸고 조선 왕조의 중심에서 소외된 서북 지역 사람들의 불만을 대변했습니다.

홍경래의 군대는 빠르게 평안도 여러 지역을 점령하며 세력을 확장했지만 결국 조선 정부군에 의해 진압당했습니다.

그러나 이 반란은 조선 사회가 심각한 위기에 빠져 있음을 보여주는 중요한 사건이었습니다.

순조는 홍경래의 난 이후 사회 안정을 위해 강력한 통제 정책을 시행했지만 지방 관리들의 부정부패와 백성들의 고통을 근본적으로 해결하지는 못했습니다.

왕권 약화와 국정 마비

순조는 친정을 시작한 이후에도 외척들의 권력을 제대로 견제하지 못했습니다.

특히 안동 김 씨의 권세는 시간이 갈수록 강해졌고 순조의 정치적 입지는 점점 약화되었습니다.

순조의 재위 중반에는 조정의 모든 인사권이 안동 김 씨 가문의 손에 있었고 왕은 실질적으로 통치력을 행사하지 못하는 상태가 되었습니다.

이는 후대 조선 왕들이 겪게 될 정치적 한계를 더욱 심화시키는 계기가 되었습니다.

순조는 자신의 무능함을 깨닫고 아들 효명세자(孝明世子)에게 대리청정을 맡겼습니다.

효명세자는 개혁을 통해 세도정치를 견제하고자 했지만 불행히도 1830년 요절하며 개혁의 기회는 사라지고 말았습니다.

세도정치의 심화

순조는 말년까지 국정을 직접 운영하지 못했습니다.

아들 효명세자의 죽음 이후 더욱 무기력해졌고 조정은 다시 안동 김 씨 가문이 장악했습니다.

1832년 영국 상선 암허스트호(Amherst)가 조선에 접근해 교역을 요구했습니다. 이는 조선이 외부 세계와 접촉하게 되는 중요한 계기가 되었지만 조정은 이를 거부했습니다.

순조는 점점 쇠약해졌고 1834년 44세의 나이로 승하했습니다.

순조의 죽음 이후 어린 헌종(8세)이 즉위하면서 안동 김 씨의 세도정치는 더욱 공고해졌습니다.

순조의 평가

순조의 치세는 조선이 점차 몰락하는 시기의 출발점으로 평가되고 있습니다.

순조의 즉위 당시부터 어린 나이였고 정순왕후와 외척 세력에게 휘둘리며 왕권을 제대로 행사하지 못했습니다.

순조 시대의 문제점

  • 세도정치의 시작 - 외척이 정권을 독점하며 왕권이 약화됨
  • 삼정의 문란 - 세금(진정), 군역(군정), 구휼제도(환곡)의 부패 심화
  • 사회적 혼란 - 홍경래의 난과 각종 민란 발생
  • 국제 정세 변화에 대한 무대응 - 서구 열강과의 첫 접촉에도 문호를 개방하지 않음

순조가 즉위하기 전까지 조선은 영조와 정조의 개혁으로 비교적 안정된 국가였습니다.

하지만 순조의 통치 이후 조선은 점점 기득권 세력이 장악하는 사회로 변해갔고 결국 19세기말 조선의 쇠퇴와 외세의 침입으로 이어지는 길을 열어버린 인물로 평가받고 있습니다.

순조는 뛰어난 능력을 가진 군주는 아니었지만 아버지 정조의 개혁 정신을 이어나갈 기회를 잡지 못한 불운한 왕이었습니다.

또한 순조의 무기력한 통치는 조선 후기 국가의 쇠퇴를 가속화하는 결정적인 역할을 했습니다.

순조가 남긴 것

만약 순조가 정조처럼 강한 왕권을 구축하고 세도정치를 견제했다면 조선의 운명은 달라졌을까요?

순조가 아들 효명세자처럼 개혁적인 정치를 펼쳤다면 조선 후기의 역사는 달라졌을지도 모릅니다. 하지만 역사에 만약은 없듯이 순조가 남긴 세도정치는 결국 조선을 내부에서부터 차츰 무너뜨리는 원인이 되었고 이후 조선이 급격한 쇠퇴의 길을 걸어가게 됩니다.

순조 가계도

구분 이름 생몰연도 비고
정조 1752년 ~ 1800년 조선 제22대 왕
현목수빈 박씨 1770년 ~ 1822년 정조의 후궁, 순조의 생모
본인 순조 1790년 ~ 1834년 조선 제23대 왕
부인 숙원숙황후 안동 김씨 1789년 ~ 1857년 순조의 왕비, 헌종의 조모
장자(적장자) 문조 익황제(효명세자) 1809년 ~ 1830년 순조의 맏아들, 조졸
장녀(적장녀) 명온공주 1810년 ~ 1832년 김현근에게 하가
차녀(적차녀) 복온공주 1818년 ~ 1832년 김병주에게 하가
차자(적차자) 왕자 1820년 2월 23일 ~ 1820년 5월 26일 요절
삼녀(적3녀) 덕온공주 1822년 ~ 1844년 윤의선에게 하가, 임신 중 급체로 사망
후궁 숙의 박씨 ? ~ ? 순조의 후궁
서녀(서장녀) 영온옹주 1817년 ~ 1829년 병약하여 요절

 

 

반응형

댓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