월산대군 가계도와 삶, 조선의 풍류군자 월산대군 시조 추강
혹시 '월산대군'이라는 이름을 들어보신 적 있으신가요? 조선시대 역사에 관심이 있는 분이라면 한 번쯤 들어봤을지도 모르겠습니다.
대부분의 사람들에게는 그저 '성종의 형'이자 '왕이 되지 못한 왕자' 정도로 알려져 있을 뿐이죠.
그러나 이 인물을 좀 더 깊이 들여다보면 그런 단순한 설명으론 다 담아낼 수 없는 삶의 궤적이 펼쳐집니다.
흔히 사람들은 왕위 계승에서 밀려난 인물에게 '비운의 왕자'라는 수사를 붙입니다. 월산대군 역시 마찬가지로 기억되곤 합니다.
하지만 월산대군의 삶은 정치적 실패나 병약함으로 점철된 게 아니었습니다.
그는 조선의 문화를 풍요롭게 만든 시인이자 풍류객이었고 학문에 깊은 열정을 지닌 지식인이었습니다.
오늘은 월산대군의 아름다우면서 안타까운 삶을 함께 따라가 보겠습니다.
왕이 되지 않기를 선택한 사람
월산대군은 1454년 세조의 장손이자 덕종(의경세자)과 인수대비 한 씨의 장남으로 태어났습니다.
이름은 이유(李裕), 본관은 순천이었죠.
당시 조선 왕실의 장손이라는 위치는 왕위를 물려받을 수 있는 자리를 의미했습니다. 조선은 유교적 질서를 무엇보다 중요시했기 때문에 '장자 우선'이라는 원칙이 매우 강력했죠.
그렇기에 아버지 덕종이 요절한 후에도 대부분의 사람들은 장손인 월산대군이 조선의 다음 왕이 될 것이라 예상했습니다.
하지만 현실은 그렇게 흘러가지 않았는데요.
월산대군의 숙부인 예종이 즉위하고 예종도 일찍 승하한 후에는 월산대군의 친동생 성종이 왕위에 올랐습니다.
예종이 승하하면서 후계자를 정핼 때 원자인 제안대군은 4세로 지나치게 어렸습니다. 따라서 16세로 가장 나이가 많은 세조의 장손인 월산대군이 왕이 되는 것이 자연스러운 일이었습니다.
하지만 정희왕후 윤 씨는 월산대군의 병약함을 이유로 자을산군(성종)을 후계자로 지목했습니다. 월산대군은 두 번이나 왕위에서 밀린 셈이죠.
여기서 흥미로운 사실은 실록 어디에서도 월산대군이 왕위를 노리거나 이를 둘러싼 갈등을 일으켰다는 기록이 없다는 점입니다.
오히려 성종과의 우애를 지키며 권력의 중심에서 한 발짝 물러난 채 문학과 자연 속에서 살기를 택했습니다.
그 선택은 과연 '비운'이었을까요, 아니면 '자발적인 초연'이었을까요?
학문과 풍류 월산대군 시조
월산대군의 삶에서 빼놓을 수 없는 건 바로 ‘시문(詩文)’입니다. 어린 시절부터 학문에 열중했고, 할아버지 세조의 특별한 사랑을 받으며 궁중에서 자랐습니다.
월산대군의 시문은 조선 내에서도 높게 평가되었을 뿐 아니라 명나라까지 명성이 알려졌다고 합니다.
심지어 월산대군의 시가 《국조시산》, 《동문선》, 《여지승람》 등 여러 문헌에 수록되었고, 약 100여 편에 달하는 시가 현재까지 전해지고 있습니다.
가장 유명한 작품은 시조 '추강(秋江)'으로 조용한 강가에서 세월의 흐름과 인생의 덧없음을 읊은 시로 현재 교과서에도 실려 있습니다.
추강(秋江)에 밤이 드니 물결이 차노매라
낚시 드리치니 고기 아니 무노매라
무심(無心)한 달빛만 싣고 빈 배 저어 오노매라
월산대군은 책을 수집하고 연구하는 데도 큰 열정을 보였는데요, 새로운 책이 나오면 값이 아무리 비싸도 반드시 손에 넣어야 직성이 풀렸다고 합니다.
왕족이지만 인간적인 삶
조선의 왕족이라 하면 흔히 권력의 중심, 정치의 소용돌이 속에 있는 인물들을 떠올립니다. 하지만 월산대군은 조금 달랐습니다.
월산대군은 가족에 대한 사랑이 지극했고 특히 어머니 인수대비를 정성껏 간호하다가 자신의 건강을 돌보지 못해 병이 약화되었다는 일화는 매우 유명합니다.
월산대군은 35세라는 젊은 나이에 세상을 떠났고 형제애와 효심으로 인해 ‘효문(孝文)’이라는 시호를 받게 됩니다.
실록이 말하는 월산대군 평가
조선왕조실록에서는 월산대군에 대해 꾸준히 긍정적인 평가를 내리고 있습니다.
신중한 성품, 문학적 소양, 가족에 대한 지극한 사랑 등이 대표적인 덕목으로 기록되어 있고 악행이나 정치적 음모와는 거리가 먼 인물로 그려지고 있습니다.
정조와 영조 역시 월산대군을 높이 평가했는데요, 영조는 월산대군의 사당 관리가 소홀해진 것을 안타까워하며 국비를 지원해 중수할 것을 명하고 정조는 "종친의 모범"이라며 다시금 조명하기도 했습니다.
단순히 왕이 되지 못했다는 이유로 역사에서 잊히기엔 너무나 훌륭한 인물이었던 것이죠.
월산대군이 남긴 것
서울 서초구 우면동에 있는 월산대군의 태실은 서울시 기념물로 지정되어 있습니다.
비록 태항아리와 지석은 일제강점기에 반출되었지만 월산대군의 흔적이 서울 한복판에 여전히 남아 있다는 사실은 단지 기록 속 인물이 아니라 역사 내에서 존재감을 갖고 있음을 알려줍니다.
그리고 2007년 문집인 <풍월정집> 원본이 발견되면서 학계에서는 다시 한번 월산대군에 대한 관심이 높아졌습니다.
비운의 왕자였지만 조선 문학사에서 중요한 인물임을 보여주는 결정적 자료로 볼 수 있습니다.
월산대군 가계도
관계 | 이름 | 생몰년도 | 주요 사실 |
본인 | 월산대군 이유 (月山大君 李裕) | 1454년 ~ 1488년 | 세조의 장손, 덕종(의경세자)의 장남, 성종의 친형. 시호는 효문(孝文). 시문에 능했으며 왕위 계승에서 제외됨. |
조부 | 세조 (수양대군) | 1417년 ~ 1468년 | 조선 제7대 왕. 단종을 몰아내고 즉위. 월산대군을 총애함. |
조모 | 정희왕후 윤 씨 | 1418년 ~ 1483년 | 세조의 왕비. 예종과 성종의 왕위 계승을 주도한 인물. |
부친 | 덕종 (의경세자 이향) | 1438년 ~ 1457년 | 세조의 장남. 세자 시절 사망하여 왕위에 오르지 못함. 사후 덕종으로 추존. |
모친 | 인수대비 한씨 (소혜왕후) | 1437년 ~ 1504년 | 덕종의 비. 성종과 월산대군의 어머니. 인수대비로 불리며 조선 왕실 정치의 핵심 인물 |
배우자 | 승평부대부인 박 씨 | ? ~ ? | 흥복사를 창건해 남편을 추모. 후일 유생들의 공격 대상이 되었으나 연산군에게 존숭받음. |
자녀 | 파림군 | 생몰년 미상 | 월산대군의 장남. 세세한 기록은 적음. |
계림군 | 생몰년 미상 | 월산대군의 아들. 일부 기록에 등장. | |
진성부정 | 생몰년 미상 | 월산대군의 또 다른 아들로 기록됨. | |
형제 | 성종 (이혈) | 1457년 ~ 1494년 | 조선 제9대 왕. 월산대군의 친동생. 형에 대한 우애 깊음. |
조카 | 연산군 (이융) | 1476년 ~ 1506년 | 조선 제10대 왕. 월산대군의 조카. 후일 그를 추모하고 부인을 예우함. |
중종 (이역) | 1488년 ~ 1544년 | 조선 제11대 왕. 성종의 아들이자 월산대군의 조카. |
월산대군을 다룬 미디어 작품들
- 1994년 KBS2의 <한명회>에서 임호가 월산대군역할을 맡음
- 1995년 KBS2 <장녹수>에서 신귀식이 월산대군을 연기
- 1998년 KBS1의 <왕과 비>에서 어린 시절은 이인이, 성인 이후는 송호섭이 맡음
- 2007년 SBS의 <왕과 나>에서 차웅기가 월산대군의 어린 시절 역할 연기
- 2011년 JTBC <인수대비>
- 2017년 영화 <왕을 참하라>
마치며
월산대군은 권력에는 초연했지만 학문과 시에 깊이 몰두했고 형제에겐 우애를, 어머니에겐 효심을 다했던 인물이었습니다.
왕이 되지 못한 것이 어쩌면 조선의 비극일 수도 있었고 어쩌면 그런 월산대군이 있었기에 조선의 문화가 조금 더 품격 있었는지도 모르겠습니다.
조선 정치사 속에서는 조용한 인물일 수 있지만 지금까지 계속 재조명되고 있는 월산대군의 품격이 인상 깊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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