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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덕왕후 강씨, 신덕왕후 강씨 죽음과 묘가 파헤쳐진 사연

스마트블로그 2025. 3. 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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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을 세운 태조 이성계에게는 두 명의 부인이 있었습니다. 하지만 많은 사람들이 이름을 헷갈려하거나 어느 쪽이 더 '정실부인'인지 혼란스러워하곤 하죠.

흥미롭게도 우리가 조선의 첫 번째 왕비로 알고 있는 신덕왕후 강 씨는 사실 태조의 후처였다는 사실 알고 계셨나요?

신덕왕후 강 씨는 조선이라는 나라가 막 태동하던 그 혼란한 시기에 등장해 남편 이성계를 조선의 왕으로 만들었고 자신의 아들을 왕세자 자리에 앉혔습니다.

하지만 그녀가 죽은 뒤 벌어진 1차 왕자의 난 그리고 그 이후 벌어진 일련의 사건들은 신덕왕후라는 인물이 조선사에서 얼마나 상징적인 인물이었는지를 잘 보여줍니다.

이번 글에서는 신덕왕후의 생애와 그녀가 남긴 역사적 의미를 조금 다른 시각에서 살펴보려 합니다.

버들잎 설화

신덕왕후 강 씨는 고려 말의 대표적인 권문세가 집안인 곡산 강 씨 출신으로 태조보다 20살이나 어렸습니다.

그녀가 이성계와 처음 만났다는 버들잎 설화는 오늘까지도 전해지는 유명한 이야기인데요, 사실 이 이야기는 고려 태조 왕건과 장화왕후의 설화와도 매우 흡사합니다.

전형적인 '국모의 탄생' 서사죠.

하지만 이성계가 그녀를 부인으로 맞이하게 된 데에는 정치적 계산이 숨어 있었습니다.

이미 한 씨라는 본처와 장성한 아들들을 둔 상황에서 강 씨를 새 아내로 맞이한 건 동북면의 출신 이성계가 중앙 권문세가와 연결되는 결혼을 통해 입지를 강화하기 위한 전략이었습니다.

조선의 첫 왕비

1392년 고려를 뒤엎고 조선을 세운 이성계는 자신을 지지해 온 강 씨를 왕비로 세웁니다.

이성계의 이 선택은 명확한 정치적 의도가 담긴 결정이었습니다. 당시 본처인 한 씨는 이미 사망한 상태였고 이성계에게 유일한 아내는 신덕왕후 강 씨였습니다.

강 씨는 정도전 등과 함께 정치적 주체로 활동하고 자신의 아들 이방석을 세자로 책봉하는 데까지 성공합니다.

이성계는 그 선택을 기꺼이 받아들였죠.

하지만 이 결정은 곧 조선 왕실 내부에 돌이킬 수 없는 균열을 만들게 됩니다.

후계자 문제, 파국의 시작

이성계는 이미 고려 시절부터 활약하던 아들들이 많았습니다.

특히 이방과(정종), 이방원(태종)은 조선 개국에 큰 공을 세운 인물들이었고 정치적 영향력도 막강했습니다.

그런데 태조가 이복동생들보다도 나이가 어린, 그것도 계비 소생의 막내아들인 이방석을 세자로 지명했으니... 반발이 없을 수가 없었습니다.

문제는 여기에 있었습니다.

신덕왕후는 자신의 아들만을 생각했고 왕실 내부의 세력 균형이나 사대부들의 정서, 그리고 당시 조선이 처한 정치상황을 고려하지 않았습니다. 

이는 결국 1차 왕자의 난이라는 피의 사태로 이어졌습니다.

신의왕후 한 씨의 소생 다섯째 아들 이방원은 군사를 일으켜 세자 이방석을 제거했고 왕위 계승 구도는 순식간에 뒤집혀버립니다.

이후 1396년 9월 15일 신덕왕후 강 씨가 죽자 태조는 매우 애통해했다고 합니다. 

능까지 파헤쳐진 비극적인 결말

신덕왕후의 죽음 이후 벌어진 일들은 오늘날 관점에서도 믿기 어려울 정도로 가혹했습니다.

신덕왕후가 승하한 지 얼마 후에 제 1차 왕자의 난이 벌어지고 신덕왕후의 아들들은 모두 제거되었습니다.

태종 이방원은 신덕왕후의 무덤을 도성 밖으로 옮기게 했을 뿐만 아니라 능의 석물을 뜯어 청계천 다리를 수리하는 데 사용하도록 명령했습니다.

이로 인해 백성들이 그녀의 무덤 돌을 매일 밟고 지나가야 했죠.

심지어 종묘 제사에서도 왕비가 아닌 후궁의 예로 제향을 올리게 했습니다.

이러한 처사는 정치적으로 자신을 위협한 계모에 대한 철저한 복수이자 조선 왕조의 정통성을 다시 세우고자 하는 상징적인 행동이었습니다.

하지만 신덕왕후를 추모하던 백성들 사이에서는 능이 파헤쳐지던 날 하늘이 울었다는 전설이 전해집니다.

태조가 얼마나 신덕왕후를 사랑했는지 알았던 사람들은 모두 비통해했죠.

정릉 전경

88년 만의 복권

신덕왕후는 이렇게 조선 초기 역사의 한복판에서 사라지는 듯했지만 그 이야기가 그렇게 끝나지 않았습니다.

그녀를 다시 왕비로 복권시킨 건 무려 88년 숙종 때의 일이었습니다.

조선 후기 대학자인 우암 송시열이 상소를 올리며 "예법을 어긴 것은 당시 예관의 탓"이라고 돌림으로써 태종의 판단을 직접 비판하지 않고도 복권을 이루어냅니다.

이로써 정릉은 다시 왕릉의 자격을 갖추게 되었고 신덕왕후는 조선의 초대 국모로서 명예를 되찾았습니다.

그녀는 과연 야망에 눈먼 여인이었을까?

신덕왕후를 이야기할 때 흔히 나오는 비판은 '권력욕에 사로잡혀 나라에 혼란을 불렀다'는 것입니다.

하지만 그 이면에는 한 여인이 자신의 아들을 지키고자 했던 간절한 마음도 있었을 겁니다.

물론 그녀의 선택은 결과적으로 아들들을 해치게 되었고 조선 초기 왕실을 피바람으로 몰아넣었습니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그녀의 정치적 감작기아 조선 건국에서의 공로마저 평가절하되어서는 안 될 것입니다.

신덕왕후가 아니었다면, 이성계의 즉위도, 조선의 건국도 훨씬 더 어려웠을 수 있거든요.

마치며

신덕왕후는 조선의 첫 국모라는 타이틀 뒤에 치열한 권력투쟁의 흔적을 남긴 인물입니다.

한편으로는 남편을 왕으로 만든 정치적 파트너였고, 다른 한편으로는 아들의 왕위를 위해 피를 부른 야망가이기도 했습니다.

그녀의 삶은 '후처의 욕심'으로 치부하기에는 너무도 복잡하고 너무도 인간적인 이야기였습니다.

신덕왕후가 조금 더 오래 살았다면 또는 세자 자리를 조금 더 신중하게 고민했다면 조선의 역사는 완전히 달라졌을지도 모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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