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종 가계도 조선 제18대 왕 현종 예송논쟁과 왕비 명성왕후
1674년 가을 창덕궁 양심합에서 조선의 18대 국왕 현종이 33세에 눈을 감았습니다. 사람들은 "현종? 숙종의 아버지였지?" 혹은 "예송논쟁으로 유명한 왕 아닌가?"라고 하지만 현종을 숙종의 아버지, 예송논쟁 속의 왕으로만 기억하는 건 너무 아쉬운 일입니다.
현종은 조선에서 유일하게 외국에서 태어난 국왕이었습니다. 청나라 심양에서 인질로 끌려갔던 아버지 효종 아래에서 태어난 그는 어린 시절부터 격변의 시대를 온몸으로 겪었습니다.
그리고 왕이 된 후에는 조선을 덮친 최악의 기근을 버텨내며 신하들의 정치 싸움 속에서도 중심을 잡고 나라를 운영해야 했습니다.
하지만 역사는 현종에 대해서 크게 말하는 바가 없습니다.
아버지 효종은 북벌론으로 아들 숙종은 강한 왕권과 환국정치로 유명한 반면 현종은 그다지 주목받지 못했습니다.
하지만 가만히 들여다보면 효종은 조선 정치의 균형을 잡고 민생을 안정시키기 위해 고군분투했던 중요한 왕이었습니다.
인질의 아들로 태어난 왕세손
현종은 1641년 청나라 심양에서 태어났습니다. 아버지 효종(당시 봉림대군)은 병자호란 이후 인질로 끌려가 있었고 그곳에서 현종이 태어난 것입니다.
조선 왕 중 유일하게 외국에서 태어난 임금이라는 사실만으로도 그의 삶이 평탄하지 않았음을 알 수 있습니다.
다행히도 1645년 효종이 귀국하면서 현종도 조선으로 돌아왔습니다. 그리고 1649년 할아버지 인조가 승하하고 효종이 왕위에 오르면서 그는 자동으로 왕세자가 되었습니다. 당시 겨우 9살이었습니다.
어린 나이에 세자로 책봉된 만큼 철저한 교육을 받았고, 무엇보다 북벌론을 추진하던 효종의 강한 의지를 가까이서 보고 배우며 성장했습니다.
현종 가계도
현종은 조선 왕실의 직계 혈통을 계승한 왕으로, 아버지 효종과 어머니 인선왕후의 외아들이었습니다. 또한 그의 아들 숙종은 조선의 강한 왕권을 상징하는 군주 중 하나였으며 손자 경종과 증손자 영조를 거쳐 조선의 왕통이 이어졌습니다. 아래는 현종을 중심으로 한 자세한 가계도이다.
조부모
- 조부: 조선 제16대 국왕 인조(仁祖, 1595~1649)
- 조모: 인열왕후 한씨(仁烈王后 韓氏, 1594~1635)
부모
- 부왕: 조선 제17대 국왕 효종(孝宗, 1619~1659)
- 모후: 인선왕후 장씨(仁宣王后 張氏, 1618~1674)
⚠️ 현종은 효종과 인선왕후 사이에서 태어난 외아들이다.
효종 부부는 총 3남 7녀를 두었으나, 그중 현종을 제외한 남자 형제들은 모두 요절하였다.
형제자매
누나들
- 숙신공주(淑愼公主, 1634~1645) - 일찍 요절
- 숙명공주(淑明公主, 1640~1699) - 정재륜(영의정 정태화의 아들)과 혼인
- 숙휘공주(淑徽公主, 1642~1696) - 박필주(대사헌 박장원의 아들)와 혼인
- 숙정공주(淑靜公主, 1646~1668) - 심익현(좌의정 심지원의 손자)과 혼인
요절한 형제
- 이징(李澂, 1639~1640?) - 어린 나이에 사망
왕비 및 후손
왕비
- 명성왕후 김씨(明聖王后 金氏, 1642~1683)
- (청풍 김씨, 김우명의 딸)
자녀
- 명선공주(明善公主, 1660~1673) - 혼인 직전 사망
- 명혜공주(明惠公主, 1662~1673) - 혼인 직전 사망
- 숙종(肅宗, 1661~1720) - 조선 제19대 국왕
- 인경왕후 김씨(仁敬王后 金氏, 1661~1680) - 청풍 김씨
- 인현왕후 민씨(仁顯王后 閔氏, 1667~1701) - 여흥 민씨
- 인원왕후 김씨(仁元王后 金氏, 1687~1757) - 경주 김씨
- 숙빈 최씨(淑嬪 崔氏, 1670~1718) → 아들 영조 출산
- 옥산부대빈 장씨(玉山府大嬪 張氏, 1659~1681) → 아들 경종 출산
- 명안공주(明安公主, 1665~1687) - 신광수(한성부윤 신익상의 아들)와 혼인
즉위와 함께 닥친 예송논쟁
1659년 효종이 갑작스럽게 승하하면서 18세의 나이에 현종이 즉위했습니다.
하지만 슬퍼할 겨를도 없이 정치 싸움에 휘말리게 됩니다. 바로 예송논쟁(禮訟論爭) 때문입니다.
효종이 승하하자 그의 어머니 자의대비(인조의 계비) 조 씨가 얼마 동안 상복을 입어야 하느냐를 두고 서인과 남인이 대립했습니다.
- 서인 : 효종은 임금이었지만 자의대비에게는 '아들'이다. 그러니 1년 상복(기년복)을 입어야 한다!
- 남인 : 아니다! 효종은 임금이었으니 3년 상복(삼년복)이 맞다!
현종은 고민 끝에 서인의 의견(1년 상복)을 따랐습니다. 하지만 이는 후일 또다시 논쟁을 불러왔습니다.
1674년 현종이 승하하자 이번에는 그의 어머니 인선왕후의 상복 문제가 다시 논란이 됐습니다. 이번엔 남인의 주장(3년 상복)이 받아들여졌고 결국 서인이 실각하게 됩니다. 이것이 바로 2차 예송논쟁이었습니다.
어찌 보면 단순한 상복 문제가 조선을 뒤흔든 것입니다. 하지만 예송논쟁은 단순한 복상(服喪) 문제가 아니었습니다.
이는 왕권과 신권 그리고 붕당 간의 세력 다툼이 얽힌 조선 정치사의 대표적인 사건이었습니다.
조선 역사상 최악의 기근과 대동법의 확대
예송논쟁 속에서도 현종이 집중한 것은 백성들의 삶이었습니다.
현종의 재위 시기 조선은 전례 없는 자연재해에 시달리게 됩니다.
1670년부터 1671년까지 경신대기근(庚申大飢饉)이 발생하면서 조선 역사상 가장 극심한 기근이 닥쳤습니다. 전국 곳곳에서 아사자가 속출했고 전염병까지 겹쳐 백성들은 말 그대로 죽어나가기 일쑤였습니다.
현종은 이를 해결하기 위해 대동법(大同法)의 확대를 추진했습니다.
대동법이란 각 지역에서 거두던 공물을 쌀로 통일하여 납부하는 제도였습니다. 기존에는 농민들이 지방 특산물을 바쳐야 했는데 이 과정에서 세금 부담이 너무 컸고 관리들의 부패도 심했습니다.
이를 쌀로 납부하게 함으로써 백성들의 부담을 줄이고 세금 제도를 보다 효율적으로 만든 것입니다.
이전까지 대동법은 경기, 충청, 강원 일부 지역에서만 시행되었으나 현종은 이를 호남(전라도) 지역까지 확대하였습니다.
특히 전라도는 조선 최대의 곡창지대였기 때문에 대동법 확대는 국가 경제 안정에 큰 기여를 했습니다.
또한 토지 조사를 통해 세금 제도를 정비하는 양전사업(量田事業)도 실시했습니다. 이는 후일 대동법 전국 시행의 기반이 되었습니다.
문화와 과학 발전에 대한 관심
현종은 정치와 경제만 신경 쓴 것이 아니고 서양 문물과 과학 기술에도 많은 관심을 가졌습니다.
- 혼천의(渾天儀) 개량: 천문학 연구를 지원하고, 서양식 천문기기를 활용하는 데 힘썼습니다.
- 자명종 제작: 조선에서 최초로 서양식 시계를 제작하려는 시도를 했습니다.
- 동활자 10만 개 주조: 출판과 학문의 발전을 위해 동활자 제작을 적극 지원했습니다.
단명한 명군
하지만 현종은 병약한 체질이었습니다. <현종실록>에 따르면 만성적인 종기와 피부병을 앓았고 종기에 고름이 한 되(약 1.8리터)나 나올 정도였다고 합니다. 그래서인지 온천을 무척 좋아했고 자주 온천 여행을 다녀오곤 했다고 합니다.
결국 1674년 현종은 33세의 젊은 나이에 승하했습니다. 능은 경기도 구리시 동구릉 내 숭릉에 있습니다.
숭릉은 다른 왕릉과 달리 정자각이 8각 지붕으로 되어 있는 독특한 구조를 가지고 있습니다.
현종이 더 오래 살았으면 어땠을까요? 아마도 붕당 정치가 보다 평화롭게 정착되고 조선의 경제 개혁도 더욱 진전되었을 것입니다.
현종은 강한 카리스마를 앞세운 왕은 아니었습니다. 그러나 격렬한 붕당 정치 속에서도 균형을 맞추려 했고, 백성들의 삶을 개선하기 위해 대동법을 확대하고 경제 개혁을 추진했습니다.
현종은 조선의 정치 균형을 잡은 군주였고 다시 재조명해봐야 할 조용한 명군입니다.
조선 역사에서 가장 덜 알려진, 그러나 중요한 왕. 그것이 바로 현종입니다.
'조선 왕조' 카테고리의 다른 글
경종 가계도 숙종과 영조 사이에서 경종의 짧은 재위기간 (0) | 2025.03.13 |
---|---|
숙종 가계도로 보는 조선 19대왕 숙종의 여인들과 환국정치 (0) | 2025.03.13 |
효종 가계도, 효종의 북벌정책 조선 17대 왕 효종, 그는 왜 북벌을 꿈꿨을까? (0) | 2025.03.10 |
인조 가계도 인조반정으로 왕이 된 조선 제16대 왕 인조의 삼전도의 굴욕 (0) | 2025.03.10 |
광해군 가계도부터 폐위 이유, 김개시와 인조반정까지 - 광해군 외교 정책과 영화로 본 그의 삶 (0) | 2025.03.07 |
댓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