칭제건원 이야기, 황제국 고려의 연호 선포
"고려가 '황제의 나라" 였다고요?"
아마도 처음 듣는 분들은 고개를 갸우뚱하실지도 모르겠습니다.
'황제'라는 말만 들어도 중국이 먼저 떠오르는 게 보통이니까요.
그런데 사실, 고려 역시 당당하게 '황제'를 자처하며 자기만의 연호까지 선포했던 시기가 있었습니다.
중국 중심의 질서에 눌려 지냈을 것만 같은 고려가 사실은 스스로의 세계관을 내세웠던 용기 있던 순간이 있었던 것이죠.
📜 한눈에 보기
- 주제: 고려의 ‘칭제건원’과 황제국 선언
- 포인트: 고려가 스스로 황제국임을 드러낸 정치적·문화적 사건
- 읽으면 알게 되는 것: 고려의 연호 선포 배경, 당시 국제관계와 고려인의 자부심
중국만의 '천자국'이 아니다?
고려의 칭제건원, 그 숨은 의미를 알아보겠습니다.
'칭제건원'이라는 말 자체가 좀 낯설게 느껴질 수 있습니다.
사실 이 말은 "임금이 황제라 칭하고 새 연호를 정한다"는 뜻인데요, 동아시아에서 이건 정말 엄청난 선언입니다.
중국이 크게 중심을 잡고 있던 시절, 다른 나라가 황제를 자처하는 것은 '우리도 대등하다'는 힘 있는 목소리였던 셈이죠.
고려의 태조 왕건은 나라를 세우자마자 '천수'라는 연호를 썼습니다.
'하늘이 내린 나라'라는 뜻입니다.
이렇게 왕건은 자신감 있게 연호를 내세웠지만 현실은 녹록하지 않았습니다.
곧 중국과 공식적으로 외교관계를 맺게 되자 연호는 내려놓고 중국의 것을 따라야 했죠.
이유는 간단합니다.
당시에는 '황제국은 하나'라는 국제적 약속 같은 게 있었거든요.
💡TIP
‘연호’란 왕이 자신의 시대를 상징하는 공식 연도를 말합니다.
우리가 흔히 쓰는 서기와는 달리, 동양에서는 왕마다 각기 다른 연호를 사용했습니다.
고려의 ‘천수’, ‘광덕’, ‘준풍’이 모두 이런 이름이에요.
광종의 결단 - 고려의 자주성 되찾기
연호를 접었던 고려가 다시 한번 자주성을 드러낸 것은 바로 광종 때입니다.
광종은 즉위하자마자 '광덕'이라는 새로운 연호를 선포합니다.
그 당시 혼란스러운 중국의 상황을 틈타, '우리도 독립된 황제국'이라는 선언을 한 셈입니다.
이렇게까지 한 데는 이유가 있었습니다.
왕권이 약해지면서 신하와 외척, 지방 호족들이 나라를 쥐락펴락하던 때였거든요.
광종은 '황제'라는 권위를 내세워 다시 중심을 잡으려 했던 것이죠.
그리고 주변의 북방 여진족 등과의 관계에서도 스스로를 '천자'로 내세우는 게 정치적으로 유리했습니다.
즉, 겉으로는 중국에 예를 갖추고 속으로는 우리만의 체제를 굳건히 하는 이중전략이 바로 이때 시작된 것입니다.
💡TIP
이 시기 개성을 ‘황도’, 평양을 ‘서도’라 부르게 한 것도 황제국임을 상징적으로 보여주는 일이었습니다.
고려 황제국 체제의 진짜 모습
광종 이후 고려는 다시는 독자적인 연호를 공식적으로 사용하지 않았습니다.
하지만 황제국 체제, 즉 자주적이고 대등한 나라라는 자부심은 오래도록 이어졌죠.
서경파가 다시 칭제건원을 주장하다 실패한 적도 있었지만 고려 국왕은 계속해서 '해동천자'라 불렸고, 실제로 여진 등 주변 부족들이 천자에게 올리는 문서 양식으로 조공을 올리기도 했습니다.
내부적으로도 왕을 '폐하', 왕비를 '태후', 왕세자를 '태자'라 불렀고, 조·칙 등 황제만이 내릴 수 있는 명령체계가 유지됐죠.
관복도 황제에 걸맞은 것으로 갖추었고, 관제 역시 황제국 체제를 반영했습니다.
결국 고려의 칭제건원은 새 연호를 정하는 것 이상으로 나라의 자주성과 왕권, 그리고 동아시아에서의 위치까지 드러낸 아주 중요한 사건이었습니다.
고려 칭제건원이 우리에게 남긴 것
고려의 칭제건원은 자주적으로 연호를 쓴다는 선언만은 아니었습니다.
그 속에는 나라를 지키려는 절박함, 자존심, 그리고 현실과의 타협까지 모두 담겨있습니다.
'외왕내제'라는 전략도 결국 스스로의 위상을 지키려는 지혜였고요.
오늘날 국제사회에서도 남에게 휘둘리지 않으면서도 현실을 똑똑하게 바라보는 자세, 바로 이런 역사의 한 장면에서 배울 수 있는 게 아닐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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