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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주 4.3사건이란 제주4.3사건 희생자 수 잊지말아야 할 기억

스마트블로그 2025. 4. 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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혹시 제주 4.3 사건이라고 하면 어떤 이미지가 먼저 떠오르시나요? 무장봉기, 빨갱이, 혹은 군경의 진압 작전 정도일 수도 있겠네요. 하지만 이 사건을 이념 충돌이나 반란으로만 기억한다면, 어쩌면 한국 현대사에서 가장 참혹했던 비극을 모르고 있는 것일지도..

한반도 현대사의 뿌리 깊은 상처 제주 4.3 사건은 우리 사회가 과거를  어떻게 기억하고 정의를 어떻게 세울 것인가에 대한 질문이기도 합니다. 그렇다면 이제 그 진실의 시간을 함께 거슬러 올라가 보겠습니다.

1947년부터 1954년까지의 제주

제주 4.3 사건의 시계는 1947년 제28주년 3.1절 기념식으로부터 시작됩니다.

그날, 관덕정 앞에서 열리던 집회 도중 한 어린아이가 경찰의 말을 피해 달아나다 말발굽에 차이는 일이 벌어졌고, 이를 본 시민들이 항의하자 경찰은 무차별 발포를 감행했습니다.

단 몇 초 만에 여선 명이 숨지고 수십 명이 부상을 입었죠.

이 사건은 제주도 사회에 엄청난 충격을 주었고 곧이어 전국적인 항의와 총파업으로 확산되었습니다.

하지만 미군정은 사건의 원인을 '남로당의 선동'으로 규정하며 서북청년단을 파견해 검거 작전을 시행했습니다.

이 시점에서 이미 제주는 국가폭력의 전면 무대가 되어가고 있었습니다.

무장봉기와 진압

1948년 4월 3일 새벽, 남로당 제주도당의 지시로 무장대가 동시다발적으로 12개 경찰지서와 우익 인사들을 습격하면서 본격적인 봉기가 시작되었습니다.

이들은 "5.10 단독선거 반대"를 외치며 행동에 나섰습니다.

그러나 이 무장봉기는 곧 강경 진압의 명분이 되었고, 정부는 제주도에 계엄령을 선포하게 됩니다.

11월 17일 정부는 중산강 마을을 중심으로 이른바 '초토화 작전'을 개시합니다.

말 그대로 "땅을 불태운다"는 이름에 걸맞게 130여 개 마을의 95%가 불타 사라졌고, 수천 명의 민간인이 목숨을 잃었습니다.

아이부터 노인까지 구분 없이 희생됐습니다.

📌 확인된 사망자만 10,715명
📌 전체 희생자는 25,000~30,000명에 달합니다.

특히 1948년 10월~1949년 3월 사이 전체 희생자의 67.2% 가 이 시기에 집중됩니다.
당시엔 단순 ‘소요 사태 진압’이라 했지만 지금 우리는 말할 수 있습니다.

“그건 학살이었다.”

 

그렇다고 무장대가 무고한 존재였던 건 아닙니다.

이들도 군경 가족을 습격하고 우익 인사들을 살해했으며 마을 단위의 보복도 서슴지 않았습니다.

하지만 피해자의  숫자를 놓고 보면 토벌대에 의한 학살이 전체 사망자의 약 78.7%를 차지했으며, 무장대는 약 15.7%였다는 보고서(2020년 추가진상보고서)는 우리에게 한 가지 진실을 말해줍니다. 

이 싸움은 전투라기보다는 일방적인 학살에 가까웠다는 점을요.

국가와 민간인 사이의 전쟁

1949년까지 수만 명의 주민이 죽거나 실종되었고 6.25 전쟁 시기에는 예비검속이라는 명분 아래 재차 검거와 처형이 벌어졌습니다.

1954년 9월 21일 한라산 금족령이 해제되면서 이 피의 시간은 공식적으로 막을 내렸습니다.

하지만 사람들은 여전히 말하지 못했습니다.

제주 출신이라는 이유만으로 불온 세력으로 간주되었고, 이념 검증과 고문, 취업 제한, 지역차별은 긴 시간 동안 이어졌습니다.

제주어조차 학교에서 금지되었고 제주의 문화와 공동체는 말 그대로 짓밟혔습니다.

역사는 잊지 않는다. 우리가 잊지 않을 때까지

오늘날 제주 4.3 사건은 더 이상 '폭동'으로 불리지 않습니다.

2003년 국가 차원의 진상조사 보고서가 발간되었고 이후 여러 대통령들이 희생자와 유족에게 사과하며 조금씩 그 명예를 회복해 왔습니다.

2021년에는 희생자에 대한 '무죄' 판결이 법원에서 내려졌고, 2023년부터는 '희생자증'과 '유족증'도 발급되고 있습니다.

하지만 여전히 많은 사람들에게 이 사건은 낯설고 먼 이야기처럼 느껴지기도 합니다.

그리고 바로 그 무지가 또 다른 비극을 부를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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